당쟁이란 붕당(朋黨)이 갈려 서로 다투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붕당이란 무엇인가? ‘붕’(朋)이란 친구를 의미한다. ‘당’은 ‘편당’(偏黨)이나 ‘파당’(派黨)이다. 자기를 따르는 사람은 받아들이고, 따르지 않는 사람은 배척하는 것이 ‘당’이다. 그렇다면 ‘붕’은 좋은 뜻이지만, ‘붕당’은 나쁜 뜻이다. 그러므로 붕당은 일정한 정강이 있는 오늘날의 정당과는 다르다. 당쟁은 혈연·지연·학연을 바탕으로 한 정쟁이다.
어떤 사람은 조선시대에 ‘당쟁’이란 용어를 쓰지 않았고, 당쟁이란 용어가 일제 학자들이 쓰기 시작한 것이라 해 당쟁을 ‘붕당정치’로 고쳐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쟁이란 용어는 붕당이 갈려 서로 싸운다는 보통명사일 뿐이다. ‘붕당정치’는 ‘사림정치’로 바꾸어 써야 마땅하다. 사림정치는 사림이 정치 주체가 되어 수행한 16~18세기에 시행된 정치 형태를 의미한다.
■ 당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사림파(士林派)는 훈구파(勳舊派)라는 강력한 상대 세력이 있을 때는 단결했다. 그러나 선조 조에 훈구 세력이 무너지고, 사림 세력이 정권을 차지하자 사림이 자체 분열해 붕당이 생기고, 붕당 간에 당쟁이 치열해졌다. 그러므로 당쟁은 사림정치의 부산물로 보아야 한다. 당쟁이 유독 조선 후기에만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일제 학자들은 당쟁이 분열적인 한민족의 민족성 때문에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면 왜 당쟁이 5000년 역사 중에 유독 조선 후기 200년 동안만 있었던 것인가? 또 당쟁처럼 처절한 정쟁이 없었다고 한다. 정적만이 아니라 그들과 가까운 사람들까지 일망타진해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다. 물론 가족주의적인 전통 때문에 부모의 원수는 나의 원수라는 적개심이 작용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당쟁으로 죽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처벌은 받지만 대부분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귀양을 가는 정도였다. 그것도 정적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정국이 바뀌면 권토중래할 수도 있었다. 서양의 영웅들이 아무 죄도 없는 농민들을 끌어내어 전쟁에서 떼죽음을 하게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당쟁을 미화할 필요도 없다. 당쟁도 추잡한 권력투쟁이고 보면 더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내세워 이론적으로 싸웠다. 예론(禮論)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사이비 자작의리를 내세워 정국을 혼탁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림정치의 틀은 좋은 것이라 해도 그 부작용으로 일어난 당쟁까지 긍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 조선 때부터 혈연·지연·학연
당쟁은 혈연·지연·학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조선은 유교적 가족주의를 사회 구성의 원리로 삼고 있었다. 가족주의는 효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아버지가 하는 일은 아들이 반드시 따라야 했다. 붕당도 마찬가지였다. 부자간에 붕당이 다를 수 없었다. 있다면 그 사람은 패륜아일 터이다. 부자뿐이 아니라 친척이 뭉치고 혼맥으로 뭉친다. 당파가 같지 않으면 혼인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당쟁이 심해질수록 붕당 간에 싸움이 치열해지고 양당은 원수가 된다. 아버지가 사약을 받고 죽으면 그 아들은 사약을 받고 죽을 때 흘린 피가 묻은 옷을 입고 다니면서 복수를 다짐한다. 그래서 당쟁은 대대로 이어져 간다.
당쟁과 지연은 더욱 강한 관계가 있다. 한국 고대에는 고구려·신라·백제의 3국이 있었다. 세 나라는 혈통이 비슷한지는 몰라도 같은 나라가 아니다. 다른 나라다. 3국은 신라에 의해 통일되었으나 신라 말에 신라·후고구려(고려)·백제의 후3국으로 분립되었다. 신라는 영남계, 고려는 기호계, 백제는 호남계다. 이처럼 세 지역은 다른 체질을 가지고 있다.
후3국은 다시 기호 세력인 고려에 의해 통합되었다. 이때 신라는 고려에 귀순했지만 백제는 끝까지 저항하다가 정복당했다. 그래서 영남계는 야당으로나마 정권에 참여했지만 호남계는 철저히 소외되었다. 이후 영남계가 여러 번 치고 올라오기는 했으나 번번이 타도되고 말았다. 김부식은 윤언이에게,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김종직은 남곤·심정에게 타도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선조 조의 남인(퇴계계)과 광해군 조의 북인(남명계)이 영남계로 일시 집권했으나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호계의 서인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 이후 윤보선 대통령 때까지 기호계가 계속 집권했다.
기호계가 독주하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렸다. 영·정조 시대에는 탕평정책으로 노·소론이 공조했으나 결국 서울 출신의 노론 외척들이 세도정치를 실시해 망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니 조선이 망한 것은 당쟁 때문이 아니라 외척세도정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벌였다. 토지의 로마법적 배타적 소유권을 확립해야만 토지를 약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주 중에는 영남계와 호남계가 많았다. 기호계는 정권을 차지하고 있어서 재산이 많으면 사찰대상이 되기 때문에 토지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기호계는 집권세력이었기 때문에 관직을 가지고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으나, 영·호남 세력은 정권에서 소외되어 땅을 끌어안고 있어야 했다. 이것이 결국 기호계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영·호남계는 지주로서 자제들을 외국 유학시켜 영남계는 이승만의 자유당에 들어가 관료가 되거나 재벌로 육성되었다. 반면에 호남계는 야당인 한민당을 만들어 정치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기호계 대신 영·호남계가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당쟁은 학연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붕당은 학통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기호에는 서경덕(徐敬德)의 화담학통, 이이(李珥)의 율곡학통, 성혼(成渾)의 우계학통이 있었고, 영남에는 이황(李滉)의 퇴계학통, 조식(曺植)의 남명학통이 있었다. 화담학통은 광해군이 실각하면서 없어지다시피 하고, 율곡학통은 노론, 우계학통은 소론, 퇴계학통은 남인, 남명학통은 북인이 되었다. 이들은 스승의 학설이나 정치적 입장을 묵수했다. 혼인도 자기들끼리, 제사의 상차림조차도 각각 달랐다. 학통을 옮겨가면 스승을 배신하는 것(背師)으로 매도되었다.
■ 당쟁에 대한 평가
당쟁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다. 당쟁은 자당의 이익을 지나치게 챙기다 보니 국가와 사회를 망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탕평정치를 펼 때의 명분도 그것이었다. 일제 학자들은 당쟁이 고질적인 한민족의 분열적 민족성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니 일본이 조선의 인민을 천황 폐하의 신민으로 편입해 보살펴 주어야 했다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뿐이 아니었다. 신채호(申采浩)와 같은 민족주의자들은 양반과 유학자들이 나라를 망쳐 버렸으니 빨리 유교 전통을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 정권과 장면 정권을 다 같이 “이조의 당파정치 전통을 이어받은 봉건적 수구세력”으로 규정해 이를 타도하는 것을 5·16의 명분으로 내걸었다. 그는 일본 육사를 다니면서 군국주의의 효율성을 보았다. 그래서 당쟁으로 찌든 사림의 문치주의를 버리고 군인이 지배하는 군사정권을 수립했다. 주업도 농업에서 상공업으로 바꾸었다. 조국 근대화의 기치를 내걸고 배고픔을 해결하고 자주국방을 달성하려 했다. 이른바 개발독재가 된 것이다.
■ 잘못된 유산, 그대로 전수
조선이 망했으면 조선의 정치와 문화를 총정리했어야 했다. 고려의 <삼국사기>, 조선의 <고려사>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그럴 겨를이 없었다. 오히려 일본의 원시축적 과정에 편입되어 식민통치를 겪게 되었다. 뒤늦게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지만 해방이 미군에 의해 주어지고 그 때문에 분단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 어수선한 건국 초창기에 조선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재정리할 틈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당쟁의 유산도 청산되지 않은 채 그대로 전수되었다. 아직도 우리 정치에서 혈연·지연·학연이 판치고 있지 않나? 국회의원이 대물림되고, 좋은 혼처를 찾기 위해 ‘마담 뚜’들이 바쁘지 않은가? 아직도 영남과 호남이 갈려 정쟁을 계속하고 있지 않은가? 3국시대가 재현되어 그들끼리는 물과 기름이다. 도시로 와도 서로 배척하고 섞이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계속 지방색을 부추긴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목포상고가 어떻고, 부산상고가 어떻고 하는 말도 나돌았다. ‘영포라인’이니 ‘고소영’이니 하는 말도 유행했다.
조선 시대에는 유덕자(有德者)의 세상이라 덕이 없으면 정치에 나설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말 일제 시대에는 국권을 되찾기 위해 유지자(有志者)가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지금은 유력자(有力者)의 세상이라 돈 있고 배경 있는 사람이 아니면 정치를 할 수 없다. 도덕이나 지사는 필요 없다. 오직 돈과 권력이 제일이다. 그러니 줄서기가 유행이고 돈 정치를 피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선량 중에 40%가 범죄자란 말이 나오게 마련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의 정치에서 다시금 유덕자나 유지자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도덕적 수양이 되어 있어야 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조선의 지도자들은 수신(修身)이 되지 않으면 치인(治人)을 할 수 없다고 되어 있었다. 과거 시험도 결국은 도덕 시험에 불과하다. 시험과목인 유교 경전은 도덕 교과서였다. 수신이란 모든 문제를 남에게 돌리지 않고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 어디에, 어느 시대에 내놓아도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지금의 정치가 왜 혼란스러운가?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니 지도자가 될 사람에게 과거시험과 같은 일종의 자격 시험을 부과하면 어떨까? 그래야 범죄자들에게 나라 살림을 맡기는 일이 없을 것이다.

▲ 동서분당
1575년 조정의 요직인 이조전랑(吏曹銓郞)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림의 분파싸움. 싸움의 당사자인 김효원과 심의겸이 각각 서울 동쪽(건천동)과 서쪽(정동)에 살아 동서분당으로 부른다. 사색 당쟁의 시작이 됐던 사건이다.
▲ 예송논쟁
조선 현종 때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상례 문제를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두 차례에 걸쳐 대립한 사건. 복상 기간에 관한 논쟁이었지만 그 기저에는 왕권의 특수성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입장 차이가 있었다.
▲ 회니시비
조선 숙종 때 송시열과 윤증이 윤선거의 묘갈명을 계기로 대립하다 학문과 정국 운영에 대한 분쟁으로 확대된 사건. 이를 통해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렸다. 송시열이 살던 회덕(懷德)과 윤증이 살던 이산(尼山)의 첫 글자를 따서 ‘회니시비’, ‘회니논쟁’으로 불린다.
- 경향신문 2014년 4월 14일자 14면 기사 -
'쉬어가기 > 읽을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해 브렌든 (0) | 2014.05.01 |
---|---|
[감동을 주는 글] 우리 형 (0) | 2014.04.27 |
공소와 기소 (0) | 2013.11.05 |
메라비언의 법칙 (0) | 2013.08.01 |
독일인의 3대 장수 비결과 인생의 3대 악재 (0) | 2013.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