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필요한 세상
2013. 6. 1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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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학자 겸 문신. 조선 시대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병조참의(兵曹參議)·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지낸 실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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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762년 진주목사 정재원의 아들로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지방관인 아버지를 따라 어려서부터 전국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16세 때 서울로 올라와 이승훈, 이가환 등에게 학문을 배우며 실학자였던 이익의 학문을 계승했다.
1789년(정조 13년) 문과에 합격하여 여러 벼슬을 했으며, 경기도 암행어사를 지내면서 지방 행정 경험을 쌓기도 했다. 그는 행정 실무에 능하고 학문이 뛰어나 정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힘든 삶을 살았다.
1801년(순조 1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사옥에 관련되어 경상도 장기로 유배를 갔다. 당시는 외래 종교인 천주교를 믿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갖은 고생을 하던 때인데, 여기에 정약용이 억울하게 말려들어 고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다른 사람 같으면 의욕을 잃고 삶을 포기했겠지만, 정약용은 스스로의 마음을 가다듬고 학문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 덕분에 강진 일대에서 18년 동안 머물며 정치ㆍ경제ㆍ지리ㆍ역사ㆍ문학 등에 관한 책을 500 여 권이나 쓸 수가 있었다.
1818년 이태순의 상소로 길고 긴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 후 고향인 경기도 광주 마현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정약용은 당파를 떠나 여러 학자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학문을 계속 넓혀가다가 1836년 세상을 떠났다. |
업적
다산 정약용은 북학파의 주장을 보완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우리 나라의 과학사에 중요한 인물이다. 정약용은 학문을 받아들임에 있어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자세를 가졌기 때문에 청나라에서 새롭게 전래된 경전 해석 방법인 고증학이나 서양에서 전래된 서학 등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고증학의 실증적 태도 등 객관적 학문 자세는 따랐지만, 실증이라는 수단만 빠지지 않고 실용이라는 목적을 추구하였다. 즉, 인간과 사회가 보다 풍요롭게 사는 것을 추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국가 경영에 관련된 모든 제도ㆍ법규에 대하여 준칙이 될 만한 것을 서술한 「경세유표」와, 지방의 관리인 목민관이 백성을 다스리는 요령과 본받아야 될 만한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목민심서」, 죄인을 처벌할 때 유의해야 할 점과 법을 적용할 때의 마음가짐 등을 제시한 「흠흠신서」 등은 그의 정치ㆍ사회ㆍ경제 사상을 종합한 것으로서 유명하다.
한편 그는 역사와 지리에도 깊은 관심을 두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연구하였으며, 서양의 과학 지식과 기술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한강의 배다리 가설과 수원성 설계, 성제설과 거중기의 창제, 종두법의 연구와 실험 등을 직접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아방강역고」, 「아언각비」, 「대동수경」, 「마과회통」, 「의령」 등 모두 500여 권의 저술서가 있는데, 이는 「여유당전서」에 함께 묶여 기록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