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기/읽을거리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꿈이 필요한 세상 2008. 12. 9. 19:03

 

 

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萬里)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人跡)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지금의 나와는 다른 무엇이 되어…

강은교 시인의 등장은 우리 시단에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보통 여류라 하여 낮춰 부르던 여성시인의 위상을 여류가 아닌 한 사람의 시인으로 보게 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강인하고 깊으며 아름답다. 문학청년 시절 긴 생머리의 강은교 시인 사진을 보며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던 바람이 작년에야 이루어졌는데 이미 정년을 바라보는 연배에도 불구하고 그 흑백사진 속의 실루엣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평생을 안고 다니는 지병과 수술, 그리고 평탄치 못했던 생활 속에서도 어쩌면 그리 변하지 않았는지…. 무협지를 보면 고수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내공이 깊어지는데 시인들도 그런 내공들을 지니고 있는 분들이 많다. 부산 범어사를 가면 옆의 아파트에 사는 시인을 혹 만날지도 모른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나든지 불이 되어 만나든지 시인은 지금의 나와는 다른 무엇이 되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변해서 이 미욱한 삶을 벗어나자고 권한다. 아직 처녀인 바다도,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도 시인에게는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이에 대한 배려로 아직 열려 있다.

 

친구도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친구가 있고 볼 때마다 변해서 놀라움을 주는 친구가 있듯이, 사랑도 서로 변하여 넓고 근원적인 곳으로 흘러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이다. 나는 아직 잡념의 불이 꺼지지 않아 흐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네가 물이 되어 흐른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 글

전윤호 / 시인.
저서로 <순수의 시대>, <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연애소설>, <한국판 어린왕자> 등이 있다.